영국은 한때 인류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며 제국의 영화를 누렸다. 산업혁명 발상지인 만큼 자본주의 전개 과정의 우여곡절도 가장 일찍 겪기 시작했으며 성장 한계나 모순에 봉착할 때마다 식민지를 통한 이익으로 돌파했다. 자연히 반(反)자본주의적 세계관·가치관 또한 앞서 구축된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영국에서 집필하게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2일(현지시간) ‘복지보다 시장 가치’를 외치며 첫 아프리카계 보수당 대표로 선출된 케미 베이드녹에 대해 ‘복지 만능 영국병’ 치료에 매진한 마가렛 대처(1925~2013) 같은 ‘철의 여인’일지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 현 집권 노동당의 고충이 표출되고 있다. 키어 스타머정부가 대학 재정 강화를 위해 8년 만에 자국인 등록금 상한선을 인상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상 세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민자 문제와 무관치 않아 영국의 복합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4일 현지 언론에 따르면 브리짓 필립슨 교육 장관은 자국 학부생 연간 등록금 상한을 9250파운드(1650만 원)에서 내년 9535파운드(1701만 원)로 올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2012년 9000파운드였던 자국인 등록금 상한이 2017년 9250파운드로 인상된 후 동결된 상태였다. 필립슨 장관은 향후 물가 상승률에 따른 인상 여부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앞서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 6월 보고서에선 물가 상승률을 반영할 경우 향후 5년간 등록금 상한이 1만500파운드(1872만 원)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번 등록금 인상은 영국 대학들의 재정난 증가에 따른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대학 재정을 외국인 유학생에 의존해 온 게 영국의 현실이다. 유학생들에겐 등록금 상한 제한이 없으며 이들은 영국인보다 보통 3~4배 이상의 등록금을 내야 한다. 2021년 잉글랜드 지역 외국인 학생 비율이 24%에 불과한데 등록금 총수입 내 비중은 40%나 됐다고 더타임스가 전하기도 했다.
이민자 문제로 몸살을 앓으며 높아진 관련 규제 요구 속에 영국 정부는 가족동반 금지 등 학생비자 제한을 늘렸고 유학생 감소 추세란 이에 따른 불가피한 변화이기도 하다. 내무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학생비자 신청이 18.7% 줄었으며 이는 지난 20여 년간 최대 폭의 하락이다. 대학의 약 40%가 직전 학년도에 적자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폐교 위기의 대학도 늘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2020년 제1야당이던 노동당의 대표 경선 당시 대학등록금 폐지를 공약했다가 지난해 철회했다. 지난달 말 발표된 증세안이 일각의 반발을 사고 있어 등록금 인상은 현 정부에 더욱 부담을 줄 조짐이다. 로라 트로트 보수당 예비내각 교육 장관이 “노동당은 선거 공약에 없던 대학 등록금 인상 계획을 갑자기 제출했다”며 사실상의 세금 인상”이라고 꼬집었다.
학비 부담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4일(현지시간) 20대 청년들의 경제적 독립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며 주요 원인으로 주거비 급등을 지목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나 성인이 된 Z세대 중 최상위 연령층인 25∼27세의 경우 작년 기준 3명 중 1명꼴로 부모 등 윗세대와 함께 산다. 20년 전 20%보다 높은 비율이다.
최근 버진미디어의 18∼35세 MZ세대 대상 조사에서도 3분의 1이 주거비와 전기·수도 요금을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나왔다. 또 생애 첫 주택 구매자의 평균 연령이 역대 최고인 34세, 주택을 소유한 25세 미만 비율(10%)은 20년 전 24%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주택 임대료 상승률이 올해 초 연 9.2%로 2015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였다.
또한 25세 미만 월세 거주자 비율은 74%로 25∼34세(39%)의 두 배에 가까웠고 25세 미만자들의 수입 내 월세 비중이 47%나 됐다. 수입의 거의 절반을 주거비로 지출한다는 뜻이다. 싱크탱크 레졸루션 재단의 몰리 브룸 분석가는 “물가가 급여보다 훨씬 빨리 올라 내집마련 등 인생 이정표에 훨씬 늦게 도달하게 된다. 부모의 경제적 도움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고 짚었다.
여러 조사들에서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는 20대 영국 청년들의 현실이 뚜렷히 감지된다. 피닉스그룹은 성인 2000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Z세대 성인 68%가 경제적 이유로 사교 모임·활동을 거절한다고 답한 결과를 내놨다. 또 다른 조사에선 25% 이상이 술·담배 등 기호식품에 전혀 돈을 안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FT는 경제적 불안정이 청년들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6∼27세가 정신적 문제를 들어 복지수당을 청구한 건수는 지난 3년 동안 두 배 이상 늘었다. 크레이그 모건 킹스칼리지런던 사회정신건강센터 공동 소장이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적 불안의 급증, 내집 마련 사다리를 오르기 어려워진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집중된 결과”로 설명했다.
지지난달 BBC방송은 8월 기준 영국 집값이 2년 만의 최고치를 찍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로이즈그룹 계열 은행 핼리팩스 통계에서 영국 주택가격이 평균 29만2505파운드(약 5억1350만 원)로 작년 동기보다 4.3% 올라 있었다. 이는 주택가격 사상 최고였던 2022년 6월 29만3507파운드(약 5억1530만 원)에 약간 못 미치며 전년 대비 상승률은 2022년 11월 이후 가장 높다.
또 다른 금융기관 네이션와이드가 9월 말 발표한 통계에서도 8월 주택가격지수가 2.4% 올랐다. 2022년 12월 이후 최고 상승률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기준 금리를 처음 인하해 주택담보대출도 전보다는 수월해져 주택 매매가 활발해진 것으로 풀이됐다.
런던 지역 부동산 중개인 제러미 리프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7월 초) 총선 결과로 정치적 불확실성을 끝냈을 때 시장이 비로소 안도했다. 금리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안도했다”고 분석했다. 핼리팩스 통계에 따르면 영국 지역 가운데 북아일랜드의 연간 가격 상승률이 9.8%로 가장 높았다. 전국에서 가장 집값 비싼 수도 런던의 평균가는 53만656파운드(약 9억4100만 원)로 작년 8월보다 1.5% 올랐다.
이에 어맨다 브라이든 핼리팩스 주택담보대출 책임자는 “최근 가격 상승이 대체로 양호한 시기의 영국 주택시장을 반영한다”며 “기존 주택 소유자에게는 반가운 뉴스지만 여전히 담보대출 고비용에 적응 중인 구매 희망자에겐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청년층이 연애·결혼·출산을 주저하는 다양한 이유의 핵심에 주거 문제가 있다. 고도 산업사회 보편의 고민이자 결국 저출산·고령화 가속화의 직접적 원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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