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을 ‘간첩’이라 부르지 못해 제대로 처벌도 못 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현실의 문제를 알고서도 수년 동안 방치했다는 점이다. 최근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 비밀 요원들의 신상 정보 등 중대한 군사기밀을 중국 동포(조선족)에게 유출한 혐의를 받아 구속된 정보사 군무원에게 ‘간첩죄’가 적용되지 못했다. 대신 이보다 훨씬 가벼운 군사기밀 누설 혐의가 적용됐을 뿐이다.
정보사 군무원 A씨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정보사의 비밀 요원인 ‘블랙 요원’과 외교관 등 신분인 ‘화이트 요원’ 관련 정보 수천 건을 유출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해외 첩보 활동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신분을 위장해 활동하는 블랙 요원들에게 신상 정보 유출은 매우 위험한 신호다. 신분이 노출된 이상 첩보 활동 일선에 나서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이는 연쇄적으로 정보망의 혼란을 가져오고 이를 회복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국가안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실제로 정보사는 요원들의 신상 정보가 유출됐다는 걸 파악한 직후 신분을 위장해 활동 중인 블랙 요원들을 즉각 복귀시켰다고 한다. 현지에서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네트워크도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으로 수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우선 납득하기 어려운 건 A씨에게 간첩 혐의가 적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군형법 13조는 “적을 위하여 간첩 행위를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적의 간첩을 방조한 사람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는데 여기서 ‘적’이란 오로지 ‘북한’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A씨의 경우처럼 군사기밀을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에 넘겼다면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법에서도 마찬가지다. 형법 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 활동을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는데 여기서도 ‘적국’은 북한에 한정된다.
이렇게 간첩 행위의 대상을 적국으로 한정하는 건 미국·영국·독일 등 다른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규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간첩죄를 적국으로 한정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우리나라는 6·25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에 형법이 제정되면서 적국을 북한으로 한정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지 대상 국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군사·안보·과학·경제 등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간첩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71년 전에 만들어진 법 조항이 지금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2018년에도 정보사 공작팀장이 일본과 중국에 군사기밀 100여 건을 팔아넘긴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일본·중국이 적국(북한)이 아니라는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하고 군사기밀 누설 혐의만 적용해 4년형이 선고됐다.
간첩죄가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해지는 반면, 군사기밀 누설죄는 10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형이 적용된다. 적을 오로지 북한으로 한정한 시대착오적 법 조항이 현재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이 허점이 악용될 소지도 있다.
사실 간첩죄 대상을 북한에서 외국 전체로 확대 적용하자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국회에서는 2004년부터 간첩죄를 확대하는 내용의 형법·군형법 개정안이 꾸준히 발의됐다. 하지만 번번이 본회의 통과에 실패하는 바람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다행히 22대 국회에서 여야는 간첩법 개정에 공감대가 형성된 분위기다. 하루속히 법 개정을 서둘러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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