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새싹은 보드랍다. 하지만 힘이 세다. 곡괭이조차 박히지 않는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민다. 새싹은 작고 연하다. 하지만 그 안에 집채만 한 나무를 품고 있다. 약한 것은 강하고 작은 것은 크다.
세상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옛사람들은 작고 보드라운 새싹이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신령한 기운이 있어 세상을 키우고 움직인다는 것을. 그것을 세상에 전하고 퍼뜨리는 게 영성을 가진 존재-인간의 지극한 의무였을지도 모른다.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이러한 신령한 기운, 우주의 충만한 기운에 영기(靈氣)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동이나 서나 거주 지역에 관계 없이 공통적으로 이 기운을 느끼고 표현해 왔다. 대표적으로 서양에서는 ‘생명의 나무’에, 동양에서는 용과 봉황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미술품은 조형언어로 되어 있다
강우방 원장이 14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세계 최대 최고의 회화, 조선시대 괘불과 영기화생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다.
괘불이란 법당 앞에 걸어놓는 커다란 부처 그림을 말한다. 커도 보통 큰 게 아니다. 큰 것은 15m에 달한다. 너무나 커서 가까이 다가가면 무슨 그림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다. 멀리 떨어져야 보이는 그림이 괘불이다.
“절에서 불교의식을 치를 때 법당에 들일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면 큰 법당 앞에 괘불을 걸어 멀리서도 부처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통도사 괘불은 일체가 문양(pattern)이다. 그 문양은 쉽게 보이지 않을뿐더러 지금껏 누구도 그림에 담긴 사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강 원장은 학계에서는 불상 연구자로 알려졌지만 영기화생론으로 건축·불화·고려청자의 실체를 밝혀나가고 있으며 나아가 모든 나라의 모든 장르를 해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이번에 은해사(영천)·미황사(해남)·통도사(양산)·율곡사(산청) 네 사찰의 괘불 연구 결과를 공개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인 영기화생론으로 작품을 심층 분석한다.
강 원장은 일본에 1년 반 동안 머물며 전역을 답사하고 박물관에서 작품 조사를 했다. 또 3년 간 미 전역의 박물관을 도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유럽인들 안 갔겠는가. 그리스를 비롯해 프랑스·독일의 유적 유물을 심층적으로 조사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조사했고 파리 근교의 성당도 모조리 조사했다.
이렇게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작품을 보는 동안 강 원장은 조선의 괘불이 세계에서 가장 큰 상징체일 뿐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건축 계획 단계에서부터 괘불 공간을 만든 유일한 곳으로 그가 20년 남짓 괘불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발표한 공간이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한 해에 두 번 괘불을 교체한다. 새로운 괘불을 걸 때마다 통도사로 달려갔다. 그곳 연구실에 도움을 청해 직원 10여 명이 도르래로 괘불을 끌어 올리면 그 상태로 밑부분부터 사진을 촬영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50cm씩 올리고 촬영하고 다시 50cm를 올리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촬영에만 2시간이 걸린다. 원래는 위에서부터 사진을 찍었는데 어느 날 미황사 괘불을 조사하는 중에 방법을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영기는 아래에서 위로 뻗어나가는 구조이므로 밑에서부터 조사해야 올바로 작품을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 괘불은 121점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야외용 괘불은 총 121점이다. 괘불은 함에 넣어 대웅전에 보관하는데 워낙 무거워서 15명이 달라붙어 운반해야 한다. 조선의 온갖 문화재가 약탈되는 중에 괘불만은 온전히 지켜낼 수 있던 것은 바로 대단한 무게 때문이다.”
현존하는 괘불은 보존 상태가 좋다. 특히 거대한 불화일수록 깨끗하다. 석가탄신일 행사 때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괘불 무게로 괘불대가 꺾어지므로 몇 년 동안 한 번도 걸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세미나를 개최한 이유에 대해 “불화 전공자들이 의외로 괘불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미술품은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다. 미술품은 ‘조형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조형언어는 문자언어처럼 음소를 지니고 있지만 발화하지 않으므로 ‘침묵의 언어’다. 조형언어의 음소는 단 4개다. 인류가 남긴 어떤 미술품도 이 공식을 비껴가지 않는다. 인류가 창조한 모든 미술품은 ‘조형언어’로 이루어졌다. 세계의 어느 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이다.”
그는 20여 년간 세계의 미술품 5만여 점을 ‘채색분석’하면서 조형언어가 인류 공용어인 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채색분석이란 조형언어의 4가지 음소인 ‘보주’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을 색깔로써 분리·추출해 내는 방법이다.
그의 책상에는 채색분석을 위한 다양한 색연필이 준비돼 있었다. 채색분석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미술품의 도안을 그리는 것이다. 완성된 도안은 요즘 유행하는 ‘컬러링북’을 연상시킨다.
다음 단계에서는 보주에서 뻗어나간 최초의 ‘제1영기싹’을 구분해 칠해준다. 이어 ‘제2영기싹’를 찾아내는데 그것은 반드시 1영기 옆에 대칭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두 영기싹 사이에는 볼록하게 움트고 있는 ‘제3영기싹’이 존재한다. 이게 조형언어의 전부다. 이것이 무한반복하며 미술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 공식이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강 원장의 색채분석을 지켜보면서, 완성된 미술품은 또 하나의 보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영감의 싹을 내밀 준비를 하는 보주. 영감의 원천으로서 미술품은 대중을 만나고 불자를 만나며 교인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감으로 대중은 예술을 하고 정치를 하고 삶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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