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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사기, 반역의 메달
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19] 김한정 ‘가든 사업’의 특급 도우미 헤르스빅
화려한 인맥의 헤르스빅… 노벨상 향하는 지름길
국정원 “귀순 황장엽 입 막아라”… 北 눈치보기에 노심초사
김기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31 06:20:17
 
[편집자 주]
2000년 12월10일,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 게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탄두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김대중이 전 세계를 상대로 어떻게 가짜 평화를 만들어 노벨상 사기극을 벌였는지, 어떻게 노벨평화상과 핵무기를 뒷거래했는지… 양심 증언으로 미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락받은 유일한 한국인 김기삼 변호사와 한반도 전문 국제 저널리스트 도널드 커크가 밝히는 아찔하고도 끔찍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김기삼 전 국정원 내부고발자
▲ 도널드 커크(Donald Kirk) 국제 저널리스트
 
 
 
 
 
 
동아일보의 ‘비화(祕話) 국민의 정부’
 
DJ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동아일보는 ‘비화(祕話) 국민의 정부’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냈다. 2003년 3월26일자 동아일보엔 ‘DJ 노벨상 수상 막전막후’라는 제목으로 DJ정부의 노벨상 공작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황당한 거짓말을 그대로 옮기는 등 조악하고 형편없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부 흥미로운 사실도 소개했다.
 
“또 정치권 안팎에서는 국정원이 노벨상 지원을 위해 상당액의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여권 일각에서는 ‘학자 출신 M씨가 노르웨이 현지 인맥과 접촉한다는 구실로 국정원 돈을 받아 실제로는 집을 사는 데 쓰는 등 개인적으로 챙겼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여기서 M씨로 언급된 사람은 문정인이다.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그는 첫 국정원장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이 ‘돈 문제’가 발목을 잡는 바람에 입각하지 못했다.
 
기사는 또한 루네 헤르스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단초는 1998년 말 한반도 비무장지대에서의 평화 콘서트 개최를 위해 방한한 노르웨이 인권단체 ‘월드 뷰 라이츠’의 헤르스 비크 사무총장과 김한정의 만남이었다. 김한정은 당시 비크를 영접, 비무장지대 답사 작업 등을 안내했다. 결국 비무장지대 평화 콘서트는 무산됐지만 김한정과 비크는 그 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기사는 루네 헤르스빅의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헤르스빅이 서울을 방문한 시기도 엉터리로 기록했다. 헤르스빅이 방한한 것은 1998년 말이 아니라 1999년 2월경이었다. 양세훈 대사가 1998년 12월 오슬로를 방문한 김상우에게 헤르스빅을 소개하고, 김한정이 1999년 1월 이후 노르웨이를 방문한 다음 헤르스빅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 황장엽(왼쪽) 북한 전 노동당 비서는 자신을 수행하던 김덕홍과 함께 1997년 2월 중국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던 길에 주 북경 한국 총영사관에 뛰어들어 한국으로 귀순했다. 연합뉴스
 
 
어쨌거나 기사는 헤르스빅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한정이 그를 판문점에 데려갔고, 판문점을 둘러본 헤르스빅은 비무장지대(DMZ)에서의 평화 콘서트와 동티모르 및 미얀마(버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 등의 아이디어를 김한정에게 제공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이 DJ의 정책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헤르스빅이 말한 세계의 관심이란 노벨위원회의 관심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특급 도우미가 된 헤르스빅
 
이후 헤르스빅은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에 특급 도우미가 되어 노벨상을 향하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헤르스빅이 일개 노르웨이 인권단체의 사무총장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인권 활동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르스빅은 김한정에게 문화행사뿐만 아니라 신생국 동티모르와 군부 독재국 미얀마 등 제3세계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도 김한정에게 조언을 해 주고 길을 열어 주었다.
 
1999년 7월, 헤르스빅과 김한정은 함께 방콕에서 열린 ‘PD 버마(Promoting Democracy in Burma·버마 민주화운동)’ 회의에 참석했다. 거기서 헤르스빅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에 망명해 싸우고 있던 라모스 호르타를 김한정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헤르스빅은 그 자리에서 호르타에게 김대중의 세계 인권운동에 대한 자신의 지지 입장을 전달했다. 그 후 김한정과 호르타는 동티모르에 같이 들어갔다. 호르타는 그 후 동티모르의 외교 장관이 되었다가 총리를 거쳐 대통령까지 됐다.
 
헤르스빅의 화려한 인맥
 
국정원 노르웨이 파견관 박노용은 헤르스빅에 대해 “월드뷰 인권재단 사무총장으로서 국제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피디 버마 노르웨이 지부 사무총장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보고했. PD 버마는 셸 마그네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가 설립한 단체이다. 또한 박노용의 전문은 “헤르스빅이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호세 라모스 호르타 동티모르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과도 친분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박노용은 “헤르스빅이 넬슨 만델라·아웅산 수치·라모스 호르타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근황을 추적하고 그들이 정치적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후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썼다. 이 밖에도 헤르스빅의 인맥 수첩에는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친북 인사인 윤이상과 그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9년 초 월드뷰 인권재단은 판문점에서의 평화 콘서트와 전시회 준비에 속도를 냈다. 이때부터 김한정과 헤르스빅은 NGO(시민단체 등 비정부기구)를 통한 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헤르스빅은 월드뷰 인권재단을 통해 북한과 채널을 개설했고 몇 차례 북한을 다녀왔다.
 
월드뷰 측은 2000년 말까지 평화 콘서트와 전시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작업했다. 이를 위해 헤르스빅은 1999년 한 해 동안 세 차례 서울에 왔다. 연초에 있었던 첫 번째 방문부터 헤르스빅과 김한정은 북한의 협조를 끌어내는 방안을 논의했다.
 
김한정의 ‘가든 사업’… 또 한 명의 초청자 얀 람스타드
 
한편, 김한정의 가든 사업에는 또 다른 초청자가 하나 있었다. 얀 람스타드 라프토(RAFTO) 재단 부이사장이었다. 슐하임이나 헤르스빅과 달리 람스타드는 서울 방문에 드는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했다. 그는 PD 버마 회의에 참석하는 것 외에 다른 방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서울을 찾은 것은 북한 노동당 최고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최고위 탈북인 황장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장엽은 자신을 수행하던 김덕홍과 함께 1997년 2월, 중국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던 길에 주 북경 한국 총영사관에 뛰어들어 한국으로 귀순했다. 한국 도착 후 황장엽은 자신이 만들어 전파하고 북한식 사회주의의 기둥이 됐던 ‘주체사상’이 사실은 기만이고 환상이었다고 고백했다. 황장엽은 자신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사유재산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을 도입하자는 자신의 주장을 김정일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람스타드의 방한 목적은 황장엽과의 면담
 
람스타드가 황장엽과의 면담을 강력히 원했던 것은 그의 시각이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 대다수 진보적 인사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김한정과 노벨 공작팀에게는 람스타드의 이런 모습이 눈에 거슬렸지만 노르웨이에서의 그의 위치를 고려하여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당시 국정원은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황장엽의 대외 활동을 최대한 막고 있었다. 황씨는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원의 원장이었지만 신변안전을 이유로 대외 활동은 엄격히 통제받았다. 노벨상 공작팀으로서는 황장엽이란 존재가 혹시라도 걸림돌이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황장엽의 워싱턴 증언과 갑작스러운 죽음
 
국정원 안가에서 긴 시간을 머물던 황장엽은 한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강연 요청이 이어졌지만 국정원은 이를 사실상 거부해 왔다. 황씨는 국정원 내부의 대공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자신이 알고 있는 북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알릴 수 있기를 원했지만, 2003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공개적인 강연이 막혀 있는 처지였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그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DJ 정권이 끝난 후 2003년 11월, 황장엽은 워싱턴을 방문해 의회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북한의 실상을 증언했다. 이때 김기삼은 그를 만나 저녁을 같이하며 환담했다. 2010년 10월 국정원 안가에서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개월 전에도 황장엽은 다시 워싱턴을 방문해 국제전략연구소(CSIS)에서 강연을 했다. 이때는 도널드 커크 기자도 그 자리에 참석해 그의 마지막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도널드 커크 Donald Kirk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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