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군에서 낸 ‘통계연보’ 1982년판에 밀양의 명승고적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아랑사(阿娘祠)’와 ‘아랑의 전설’이 서술되어 있다.
아랑 낭자의 넋을 기리는 ‘아랑사’는 영남루 누각 아래 대밭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은 죽음으로써 ‘순수’를 지키려던 아랑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다. 아랑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음력 4월16일이면 소복한 여성들이 제관이 되어 달 밝은 밤에 아랑제를 지낸다.
아랑은 옛날 밀양 원님 윤씨의 딸로 원래 이름은 동옥이었다. 어머니 없이 유모 밑에서 무남독녀로 자라난 아랑은 아름답고도 예의범절에 밝았다. 봄철의 달빛 고운 밤 유모가 달구경을 가자고 아랑을 꾀어내 영남루로 향하는데, 그 아래 대밭을 지나갈 때 유모는 온데간데없고 한 괴한이 나타나 아랑을 해하려 한다. 죽음으로써 자기를 지킨 아랑은 참혹한 변을 당하고 유모는 성안에 들어가 호랑이가 아랑을 물어간 것처럼 꾸며 말한다.
딸에 대한 걱정과 슬픔으로 정신까지 이상해진 아버지 원님은 관직을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새로 부임해 오는 원님마다 첫날밤에 원혼을 만나 혹은 죽고 혹은 광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부임을 원하는 자가 없이 되매 고을 민심은 더할 수 없이 흉흉해지고 만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한 젊은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후 용감하게도 밀양 땅에 새로 자원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랑은 그녀의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눈치챈 이 선비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게 된다.
1월15일 국민이 한남동에서, 그리고 TV와 유튜브로, 두 눈 크게 뜨고 보고 있는 사이에 대통령이 공수처에 체포되어 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법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수사권이 없는 기관에 영장이 발부되고 또 영장 심사권이 없는 법원이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수사기관이 거짓 공문서를 발부해서 국민을 기만하는, 이런 불법의 불법의 불법이 자행되고 무효인 영장에 의해서 절차를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우리 국민 여러분께서 앞으로 이러한 형사사건을 겪게 될 때 이런 일이 정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대통령은 자신이 이 불법 절차에 응하는 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불미스러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함일 뿐이라며 국민·청년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이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것을 보고 “지금은 법이 무너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시절이지만 이 나라의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대통령의 이 담화를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는지 모른다. “불법의 불법의 불법이 자행”되고 “무효인 영장에 의해서” 밀고 들어오는 ‘무도한’ 세력에 차마 맞서 싸우지 못하고 강제집행 형식으로 끌려가야 했던 대통령의 심정을 그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고, 또 표현할 수 있을까. 억울함이 하늘을 찌르는 그 비장한 장면에서 국민은 이미 3월8일 서울구치소 앞에서 걸어 나오는 대통령을 만나는 기쁨의 눈물을 예비해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인 자신이 지귀연 판사에 의해 ‘입증’된 ‘부당한 무력’에 의해 끌려나가는 와중에 “저는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우리 국민 여러분께서 앞으로 이러한 형사사건을 겪게 될 때 이런 일이 정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의 이 말을 얼마나 많이 곱씹어 보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대통령의 그날 고통에서 내가 수년 동안 겪어 온 차마 말할 수 없는 세상의 일·학교의 일·문단의 일들을 떠올리고, 그리고 힘없는 학생들과 직책을 누리는 이들이 자기 편의 위주로 제멋대로 처리하는 일들을 생각하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지금도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 체포·구속·기소와 석방에 이르는 과정을 보며 나와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 무지막지한 과정을 덧없는 ‘좌·우’의 편가름 논리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둘러싼 부정선거 세력과 언론의 네트워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국민은 이미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암울했던 사태의 기적적인 반전을 막을 수 있는 거짓된 힘의 크기가 갑자기 애들처럼 줄어들어 버렸다.
대통령에 대한 불법 강제구인과 52일 후 천신만고 끝의 석방 상황을 지켜보며 아랑의 억울함이 풀리던 전설이 소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제 이 봄날의 희망은 모든 억울했던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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