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는 보통 사람과 삶의 목표가 달랐어요. 대부분 가족을 위해 살아갔지만 이 분은 오로지 민족만 바라봤죠. 식민지가 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의 길로 가셨어요. 두 아들한테도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라’고 늘 말씀하셨죠. 한마디로 윤 의사의 정신은 독립정신, 애국정신, 계몽정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2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암흑의 시간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향을 놓고 내부 구성원들끼리 갈등을 빚다가 분열됐고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독립운동 자금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침체기를 겪던 1931년 5월, 조선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20대 청년이 임시정부를 찾았다. 청년은 임시정부 수장인 백범 김구와 거사를 계획했다.
1년 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겸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에서 청년은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에 타격을 줬다. 그가 바로 매헌 윤봉길 의사였다. 윤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된 뒤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당했지만 그의 순국은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광복의 이정표인 카이로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사단법인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이러한 윤봉길 의사의 애국정신과 생애·업적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1965년 설립됐다. 나라 안팎으로 혼란하여 진정한 나라사랑 정신이 절실한 이 시기에 스카이데일리는 서울 서초구 매헌로에 위치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사업회)를 찾았다. 이성섭 상임이사(69)와 고수현 해설사(24), 홍민희 연구원(23)이 반갑게 맞으며 매헌 윤봉길 의사의 애국정신을 알리기 위한 단체의 활동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윤봉길 알리는 출판·홍보·교육·기념행사·기념관 운영 등 사업 진행
사업회는 주요 사업으로 윤봉길 의사와 관련한 출판·홍보·교육·기념행사 활동을 펼치고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항일독립운동사 강연도 진행하는 중이다. 침략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다른 나라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다룬 국제영화제도 기념관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성섭 상임이사가 현재 단체의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연속 간행물인 ‘겨레사랑’을 발행하면서 대중들에게 윤봉길 의사를 홍보하는 활동을 하고 있고요. 매년 4월 29일에 상해의거 기념식, 12월 19일에 순국 추모식을 개최하며 사람들에게 윤 의사님의 업적을 알리는데도 열을 올리고 있죠. 또한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짓기 공모전을 열면서 나라사랑 정신을 선양하는데 힘을 쏟고 있어요.”
“윤 의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역사 강연도 해요.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강좌 형식으로 일반 시민들한테 전달하는 것이죠. 독립운동국제영화제도 개최하고 있는데 식민 지배를 당한 다른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했는지 알리는 행사에요. 유럽 강대국들에게 식민지를 당했던 미얀마와 베트남, 모로코 등의 영화들이 대표적이죠.”
사업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수많은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들 중에서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 몸을 담그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이성섭 상임이사는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 형제들을 다 버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것에 감명을 받아 사업회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그는 윤 의사와 같은 충남 예산군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윤 의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사업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년이 넘었어요. 사업회에서 실제로 근무한지도 벌써 6~7년 정도 지났죠. 원래는 현대그룹의 현대제철에서 18년 동안 일했어요. 그런 다음 사업을 시작했다가 접고 이 사업회에 본격 관여하게 됐죠.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책을 자주 읽어요. 그 중에서도 윤 의사 책을 감명 깊게 읽었죠. 국내에 출시된 윤 의사 책을 다 읽었을 정도예요.”
이 상임이사는 오랜 기간 사업회에서 활동하며 윤 의사의 위상이 전보다 높아진 점이 보람차다고 말했다. 단순히 일본군 수뇌부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상해의거로 침체됐던 한국 독립운동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광복의 발판을 마련한 민족적 영웅으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얘기였다. 사업회가 위치한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서 윤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이 들어간 공공시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사업회가 그간 애쓴 노력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그간 홍보·선양 활동을 하며 성과를 상당히 거뒀어요. 근처 공원의 이름에 매헌을 붙이는 걸 30년 넘게 추진했는데 최근에 ‘시민의숲’에서 ‘매헌시민의숲’으로 바꾸는 결실을 맺었죠. 또한 신분당선 운영사인 네오트랜스와 서울시를 설득해 근처 지하철역 이름을 ‘매헌역’으로 부르기로 했고요. 그밖에 남부순환로 지하차도의 이름도 ‘매헌지하차도’로 바뀌었고 근처에 ‘서울매헌초등학교’라는 학교도 생겼죠.”
전시관에서 근무하는 고 해설가는 관람객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면서 관람객의 태도에 변화가 느껴질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재밌고 인상 깊게 윤 의사의 업적을 설명해주면 학생들이 우리 역사에 귀를 기울이고 매헌이라는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볼때 더욱 보람이 느껴지죠. 또 관람을 마치고 기념관 중앙에 있는 윤 의사의 동상 앞에 서서 추모하는 관람객들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고요.”
홍 연구원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매헌 윤봉길 의사를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한다. 홍 연구원은 특히 디지털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에 대해 늘 고민한다면서 좋은 반응을 대할 때면 활동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 인스타그램·페이스북에 윤 의사의 이야기를 카드뉴스 형식으로 만들어 올리는 기획을 했어요. 업적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라 나이, 가족 관계 등 소소한 내용들로 채우는 콘텐츠였죠. 그때마다 ‘되게 뭉클하게 잘 봤다’ 등의 응원하는 댓글을 보면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윤 의사의 이야기를 쉽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뿌듯하더라고요.”
24년 길지 않았던 삶, 농촌계몽운동가에서 독립운동가로
이 상임이사는 상해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누구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시기에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항일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해의거는 독립운동에 확신을 잃던 우리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직원들한테 월급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였어요. 식사를 못하는 임시정부 요원들도 많았죠. 상해의거 이후에는 달라졌어요.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 운영비를 지원해줬거든요. 윤 의사의 희생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를 존속하기는 힘들었을 것이에요. 상해의거는 본토에 있는 중국 국민마저 감동시켰어요.”
“상해의거 전에는 우리 국민도 독립운동에 확신을 느끼지 못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면 ‘개죽음 당한다’고 두려워했죠. 국민은 좌절했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는 식어갔어요. 그런 가운데 윤 의사가 의거에 성공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자신감을 얻었죠.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도 긍정적으로 변해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칠 수 있게 됐어요.”
상해의거 이외에도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식민지 통치로 피폐한 농촌을 살리고자 야학을 설치해 문맹퇴치운동을 이끌었다. 월례 강연회도 개최해 농민의 사회의식과 민족정신을 함양하는데 이바지했다. 농촌운동을 위한 교재인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부흥원을 세웠다. 월진회도 조직해 부흥운동의 모범을 보였다. 이 상임이사는 윤 의사가 전개한 농촌운동 역시 하나의 독립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윤 의사는 한학과 문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어요.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신소설, 신문 등 다양한 책들을 읽었죠. 그러던 중 농민들이 무지하다는 걸 알고 나서 그들을 계몽하는 활동에 뛰어들었어요.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고 독립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그들에게 일깨워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어요. 그 때문에 야학 등 농촌계몽운동을 하나의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하는 것이죠.”
이 상임이사는 일반 국민이 잘못 알고 있는 윤봉길 의사의 일화가 있다며 설명했다. 윤 의사하면 도시락폭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만 윤 의사가 실제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 등을 향해 던진 것은 도시락 형태의 폭탄이 아니라 물통폭탄이었다는 것이다.
“자결용으로 도시락폭탄을 가져갔는데 도시락폭탄을 터뜨리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어요. 일각에서는 ‘도시락폭탄도 던졌으나 불발됐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자결용인 도시락폭탄을 터뜨리기도 전에 붙잡히고 말았죠. 연행 당시 사진도 가짜라는 얘기도 돌았지만 윤 의사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맞는 걸로 판명이 났어요.”
윤봉길 정신이 오늘날 주는 교훈에 대해 홍 연구원은 ‘젊은 나이에도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희생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희생 덕분에 현재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고 해설가는 ‘스스로 계속 배우고 깨우치고자 하는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윤 의사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해 스스로 배우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당장 독립하지 못하더라도 강대국들끼리 싸우다보면 언젠가 조선과 같은 약소국들도 독립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발판을 마련하고자 의거를 한 것이죠. 그의 정신 중에서 ‘스스로 계속 배우고 깨우치고자 하는 것’들이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 우선 내년 상해의거 90주년을 맞이해 공연 등 기념식을 크게 개최할 것이라고 이 상임이사는 밝혔다. 또 장기적으로는 폭넓은 연령대에 다가가기 위해 청년 서포터즈 활동을 시작하고 사진 콘테스트, 글짓기 공모전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윤 의사의 정신이 현재와 미래의 대한민국에 늘 살아있게 하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윤 의사 선양사업에 참여하는 인원들 대부분이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서 청소년 위주로 초점을 새롭게 잡고 있어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기념관을 방문해 윤 의사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게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죠. 또 기념관 방문자들을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코로나19 전 연간 16만명 정도 여기를 찾았는데 근처 ‘시민의숲’에선 연간 150만명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기념관들도 들릴 수 있도록 노력해서 윤 의사의 정신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노력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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