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금융시장 불안감이 커지면서 예금보호한도를 5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가능성을 낮춰 금융소비자의 자산을 보호하고 금융사의 파산을 막겠다는 주장이다. 현행 보호한도는 23년째 동결 상태이고 전체 예금 중 보호한도를 초과한 예금은 절반 이상에 달한다.
다만 반론도 적지 않다. 5000만 원 넘게 예금한 고객이 소수에 불과해 예금보호한도를 높여도 대다수 소비자에게는 실익이 없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금융권의 보험료 부담만 늘어나 은행 등이 예금금리를 낮추고 대출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예금보험한도 상향 시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며 업권별로 차등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보호한도 초과 예금 1153조… 5년 새 400조 급증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는 20일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고 보호한도·보험료율 상향 등 예금보호제도 개편 방안을 논의했다. 예금보호제도는 금융사 파산 등으로 고객 예금을 지급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예금을 보호하는 제도다.
특히 ‘SVB 사태’ 등 금융사 파산으로 예금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예금보호제도 개선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에 따르면 예금보험공사는 은행 등 금융사로부터 보험료를 받아 예금보험기금을 마련한 뒤 금융사가 지급불능 상황에 처하면 대신 예금자에게 맡긴 예금을 돌려준다. 예금보호한도는 원금·이자를 합쳐 1인당 최대 5000만 원이다.
문제는 예금보호한도가 2001년 시행령을 통해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상향된 이후 23년째 동결돼 있다는 점이다. 예금보호한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등을 고려해 책정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5003달러로 2001년(1만5736달러) 대비 2배 이상 불어났다. 경제 규모 등에 맞게 예금보험한도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나라 예금보호한도는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7개국(G7)의 1인당 예금보호한도는 미국 25만 달러(약 3억2700만 원), 독일·프랑스·이탈리아 10만 유로(약 1억3900만원), 영국 8만5000파운드(약 1억3500만 원), 일본 1000만 엔(9900만 원), 캐나다 10만 캐나다달러(9400만 원) 등으로 한국보다 두 배가량 크다.
경제 규모를 감안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당 GDP 대비 예금자보호한도 비율(2020년 기준)은 1.34배로 미국 3.95배, 이탈리아 3.6배, 프랑스 2.82배, 영국 2.7배, 독일 2.46배, 일본 2.2배, 캐나다 1.72배 등에 비해 대체로 절반 이하 수준이다.
반면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는 예금은 늘어나는 추세다. 김희곤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은행의 부보예금은 지난해 6월 기준 총 1754조4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5000만 원을 순초과한 예금은 1152조7000만 원(65.7%)에 달했다. 2017년 724조3000억 원(61.8%)이었던 점과 비교해 5년 만에 크게 늘어났다. 같은 기간 저축은행의 순초과 예금은 5조4000억 원(10.7%)에서 16조5000억 원(16.4%)으로 3배 이상 급증했다.
정치권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여야 모두 예금보호한도 상향에 찬성하는 모습이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 의장은 21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시대에 맞고 금융위기에 대비해 보호한도 확대가 필요하다”며 “SVB 사태로 미국 정부가 보호 한도와 관계없이 예금 전액을 보증해주기로 했다. 우리나라 예금자보호한도를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관련 법안을 당론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김성한 민주당 정책위 의장은 2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예금자 보호가 현행 5000만 원까지인데 이를 1억 원으로 늘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미국처럼 전체 예금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을 곧 발의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민주당 경제위기대응센터는 예금보호한도를 1억 원 이상으로 하되 예금보험위원회 의결을 거쳐 구체적 상한을 정하는 내용의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국회에는 이미 예금보호한도 관련 법안이 여럿 발의돼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정무위원회에 1년간 심사·접수된 ‘예금자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총 7개다. 이달에는 주호영 국민의힘 의원, 김한규 민주당 의원, 양기대 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제안했다.
세 의원 모두 예금보호한도를 1억 원으로 상향하는 것에는 같았지만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주 의원의 법안은 ‘적정성을 5년마다 검토하도록’ 명시해 예금보호한도를 상향하면서 동시에 적정 수준으로 조정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 의원의 법안은 외환위기 등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만한 긴박한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 행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예금보호한도를 예치금 전체로 늘릴 수 있는 근거를 포함했다.
‘뱅크런’ 발생해도 10명 중 9명 돈 돌려받아… 실익 의문
하지만 보호액 상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금융사에 자금을 예치한 거의 모든 예금주가 현행 예금보호한도 내에 있어 한도를 높여도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국내 금융사의 부보예금 가운데 5000만 원 이하 예금자 비율은 전체의 98.1%로 나타났다.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및 개인형 퇴직연금(IRP) 예치금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지금 당장 뱅크런이 발생해도 10명 중 9명 이상은 예금을 보호받을 수 있다.
오히려 예금보호한도를 높이면 예금보험료가 늘어나 예금금리 인하, 대출금리 인상 등 금융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예금보험료는 예금보험공사가 금융사로부터 매년 걷는 특별기여금으로 금융사 파산 시 고객의 예금·보험료를 보장하는 재원으로 활용된다. 금융사 자체적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만큼 보장 금액이 늘어날 경우 보험료는 오를 수밖에 없다.
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금융사는 예금보험료로 예금보험공사에 총 2조2089억 원을 납부했다. 업권별로 은행 1조2645억 원, 생명보험 3297억 원, 저축은행 3120억 원, 손해보험 2174억 원, 금융투자 820억 원, 종합금융 33억 원 순이다. 보혐료율은 예금액 대비 은행이 0.08%, 증권사·보험사·종금사 0.15%, 저축은행은 0.4% 수준이다.
저축은행으로 예금이 쏠릴 수 있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금융소비자는 저축은행이 은행보다 고금리를 부여하고 있음에도 리스크·불안감 등에 따라 5000만 원 이하로 예금하고 있는데 예금보호한도 기준이 1억 원으로 늘어나면 저축은행으로의 예금 유인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금융사와 예금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보험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예금보험 및 정리제도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금융권역별 위험노출의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한 보호한도를 적용하게 되면 고위험 금융권역에서 고수익 추구를 통한 소비자의 도덕적 해이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저축은행의 경우 은행보다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고위험 자산에 투자하는 등 위험 노출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은행과 동일한 보호한도를 적용할 경우 도덕적 해이의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얘기다.
보호한도를 업권별로 차등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재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예금보험한도 확대는 특정 금융권역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전 권역에 적용돼 금리민감도가 높은 상황에서 예금자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우려가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예금보호제도 개선 시 예금수취기관·금융투자기관·보험사에 대해 현재와 같이 동일한 예금보호한도를 적용하기보다는 각 업권의 특성을 반영해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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